환경호르몬(Endocrine Disrup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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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환경호르몬??으로 불리는 내분비계 장애물질(Endocrine Disruptors)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 물질이 인체에들어와 쌓이면 생식능력에 심각한 이상을 일으키고, 이런 이상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탯줄을 타고 후손에게까지 전달된다는 게 불
안감의 내용이다. 게다가 이 물질이 우리 주변의 갖가지 물건 속에 숨어 인간을 ‘에워싸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불안을 넘어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터무니없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답은 ‘아니다??
이다. 내분비계장애물질과 관련해 지금까지 축적된 연구성과들은
이런 불안감에 상당한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학물질이 마치 호르몬처럼 행세
내분비계장애물질이란 생명체의 정상적 내분비 기능을 방해하는
합성 또는 자연상태의 화학물질을 일컫는다. 환경호르몬이라는 용
어는 일본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환경에 노출돼 있는 이 물질
이 사람 몸에 들어가서는 마치 인체에 본래 존재하는 호르몬 행세
를 한다는 데 주목한 것이다.
이 물질이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본의 컵라면 용기에서
사람의 생식기능에 이상을 일으키는 환경호르몬 스틸렌다이머와
스틸렌토리머가 검출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부터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도 당연히 이 생소한 물질에 대한 대책을 요구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환경부를 중심으로 한 관계당국은 민
관 합동으로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중장기대책을 발표하는 등 이례
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식품의약
품안전청은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조
사결과를 발표했으나, 민간연구기관이 이를 정면으로 뒤짚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소동도 빚어졌다.
국민들이나 당국이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흥분하고 서
둘러 대책을 발표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지만 내분비계장애물질이
최근 갑자기 출현한 ‘괴물??은 아니다. 이 물질은 이미 36년 전
미국의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 처음 윤곽이 그려졌
다. 또 지난 96년 미국의 동물학자 테오 콜본과 존 피터슨 마이어
, 언론인 다이앤 듀마노스키가 함께 쓴 <도둑맞은 미래>에서는 그
종류 몇가지와 성질까지 상세히 제시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만약 세심히 관심을 기울였다면 좀더 일찍 사회적 관
심사가 될 뻔한 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지난
해 쓰레기소각시설의 다이옥신 배출이 문제가 됐을 때다. 다이옥
신은 인체에서 생식, 면역 등 내분비계통과 태아의 발달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유독물질로 알려져 있다.
테오 콜본 등은 자신들
의 책에서 “다이옥신의 가장 큰 위협은 암이 아니라 호르몬 교란
”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다이옥신의 발암성에
관심이 쏠린 나머지 내분비계장애 문제는 스쳐 지나갔다.
국내에서도 피해사례 잇따라 발생
이에 앞서 95년 경남 양산의 LG전자 부품공장에서 일어났던 솔벤
트중독 사건도 내분비계장애물질을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 만한 계
기였다. 솔벤트5200으로 부품 세정작업을 한 남녀노동자들에게 집
단적으로 생식기능 이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특정 작업 종사자들의 직업병 정도로 취급되고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채 넘어갔다.
내분비계장애물질이 인간이 만든 물품에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 콩, 사과, 딸기, 밀 등의 식물에 존재하는 식물에스트로젠(Phy
toestrogens)도 갓난아이들에게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자연계에 존재하는 내분비계장애물질
의 영향력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인류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공적으로 생산하거나 혹은 생산과정
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각종 화학물질과 농약류 등이다.
내분비계장애물질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이
들 물질에서 벗어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최근 문
제가 된 컵라면 포장용기를 비롯해 비닐랩이나 합성세제로부터 음
식점의 플라스틱 컵, 아기들의 젖병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의 화
학제품 속에는 어김없이 내분비계장애물질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문명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런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는 살 수 없다.
그렇다고 당장 이들을 새로운 재료로 대체할 수도
없고, 혹 대체물질을 개발하더라도 십중팔구 또다시 새로운 화합
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농약도 마찬가지다. 독성이 강한 살충제나 제초제의 도움 없이 지
금의 식량생산량을 유지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이들
물질은 먹이사슬을 거치며 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짙어지며, 해류
나 바람에 실려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원시림 속이라고 할지라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일부
환경운동가들이 내분비계장애물질을 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위협
으로 보고, 지구온난화나 오존층파괴에 버금가는 지구적 환경문제
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구상에 더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내분비계장애물질이 인류에 가하는 위협을 거론할 때 증거로 제시
되는 것이 남성의 정자수 감소와 활동력 저하다. ‘정자의 위기??
는 세계 각국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지난 4월 일본의 한 대학에서 20대 남성 34명의 정액을
채취해 조사한 결과 정자수와 활동력이 세계보건기구(WHO) 기준
을 충족시킨 사람이 단 1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런 ‘정자 약화?? 현상이 계속 진행될 경우 인류에게 어
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상상만으로도 섬뜩하다.
인간만이 아니다. 야생동물에 나타난 내분비계장애의 사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됐다. 80년대 미국 플로리다주의 아푸르카호에 서
식하는 악어의 알 부화율은 수컷의 생식기 이상 때문에 20% 이하
로 격감했다. 북해연안에서는 88년 4월부터 10달 사이에 1만7000
마리의 바다표범이 면역체계 이상으로 숨졌다.
최근 노르웨이 과
학자들은 극지방에 사는 북극곰 새끼 2000마리를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무려 90마리가 수컷과 암컷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 모든 이상현상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
’는 내분비계장애물질로 지적됐다.
국내 생태계도 예외는 아니다. 낙동강 하구의 괭이갈매기는 번식
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며, 울산만 일대는 복족류의 암컷에 수컷
의 생식기가 돋는 트리뷰틸틴(TBT)의 세계 최대 오염지역으로 꼽
히고 있다.
사실 특정 내분비계장애물질들이 이런 이상을 일으킨 구체적인 메
커니즘이 아직 정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 정자수 감소를 초래한
물질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일부
학자 가운데는 인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호르몬의 힘이 워낙
강력해 환경을 통해 인체로 들어간 내분비계장애물질들은 거의 호
르몬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에게는 특정 화학물질에 의한 내분비계의 장애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내분비계장애물질 문제에 대한 세계의 대응을 보면 이 가
설은 사실상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
본에서는 인간의 생식체계에 장애를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
십만개의 어린이용 플라스틱 테이블을 폐기했으며, 유럽연합에서
는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든 장난감 제품이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
000년까지 내분비계장애물질에 대한 공통시험방법을 만들어 규제
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위험물질 9종 공포는 지속된다
현재 세계야생보호기금(WWF)에서는 농약과 플라스틱가소제, 합성
수지원료 등을 중심으로 67종을, 미국 환경보호청과 일본 국립의
약품식품위생연구소는 각각 69종과 143종의 물질을 내분비계장애
물질로 분류해 놓고 있다.
국내에서는 WWF가 지정한 67종 가운데
이번에 문제가 된 플라스틱제조 원료인 스틸렌다이머 등 9종의
산업용화학물질에 대한 통제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내분비계장애물질로 분류됐는데도 통제되지 않
고 있는 물질의 연간 국내사용량은 플라스틱가소제인 디에틸헥실
프탈레이트(DEHP) 9만여t, 음료 깡통의 내부 코팅제로 주로 사용
되는 비스페놀A 6만여t 등 모두 18만t이 넘는다는 것이 환경부의
집계다.
하지만 이들 물질에 대한 통제가 이뤄진다고 해도 내분
비계장애물질에 대한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전세계적으로 한해 2천여종이 넘는 새로운 화학물질들이 합성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운데 안정성 시험이 이뤄지는 것
은 극히 일부다.
결국 원시사회로 회귀하지 않는 한 내분비계장애
물질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류가 스스로 만든
운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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